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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보테가 베네타 부활시킨 토마스 마이어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Sator 2022. 11. 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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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로고 없애고 ‘미니멀’ 디자인 추구…세계 최고의 럭셔리 브랜드로 성장시켜류서영의 명품이야기/보테가 베네타②

토마스 마이어 사진 출처 : instagram gqthailand
보테가 베네타는 창립자인 미켈레 타데이의 전처 라우라 몰테도가 인수한 뒤 경영 악화에 직면했다. 고유의 절제미와 브랜드의 방향성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국 출신의 디자이너인 자일스 데콘을 영입했다. 그런데도 어려운 경영 상황은 좀체 개선되지 않았다.

결국 구찌그룹이 2001년 2월 보테가 베네타 브랜드를 인수했다. 당시 구찌그룹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톰 포드의 권유가 있었다. 토마스 마이어가 그해 6월 톰 포드의 추천으로 보테가 베네타의 수석 디자이너로 발탁됐다. 마이어는 독일 남서부 포르츠하임의 건축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초 집안의 전통에 따라 건축을 공부했다.

그러나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뒤 진로를 바꿨다. 파리 ‘샹브르 신디칼 드 라 오트쿠튀르’에서 패션을 공부했다. 마이어는 일상복 디자인의 선구자로 꼽히는 소니아 리켈에서 남성복 디자이너로 8년간 일했다. 이어 레빌론에서 크리에이티브 디자이너로 4년간, 에르메스에서 여성복과 가죽 소품 디자이너로 9년간 각각 몸담았다.

마이어는 보테가 베네타 브랜드를 살리기 위해 1960년대 말 보테가 베네타가 광고 문구로 사용했던 ‘당신의 이니셜만으로 충분할 때(When Your Own Initials Are Enough)’에 주목했다. 그는 이 문구를 응용해 브랜드 로고를 없애 버렸다. 미니멀한 콘셉트의 디자인을 추구한 것으로 파격적이었다.

마이어는 갖은 노력 끝에 보테가 베네타를 세계 최고의 럭셔리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그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하도록 길들여졌다”며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질 좋은 캐시미어 스카프 하나 정도는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말에서 장인들이 정성을 다해 만든 보테가 베네타 제품이 ‘질 좋은 캐시미어 스카프’처럼 오랫동안 간직하고 사용하는 진정한 명품이 되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까바백, 베스트 셀러 아이템으로 자리잡아

2012년에 발표된 '더 놋(The Knot)' 백 사진 출처 :bottegaveneta

2001년 9월, 마이어는 보테가 베네타에 합류한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액세서리로 구성된 첫 컬렉션을 발표했다. 그는 보테가 베네타를 지탱하는 네 가지의 핵심으로 △최상의 품질 △소재 △뛰어난 장인 정신 △현대적인 기능성과 유행을 타지 않는 디자인 등을 삼았다. 그는 첫 컬렉션에서 이 네 가지 핵심 가치들을 잘 표현한 까바백을 발표했고 이 백은 보테가 베네타의 베스트 셀러 아이템이 됐으며 캐시 카우(수익 창출원) 역할을 톡톡히 했다.

마이어는 브랜드의 핵심 가치를 고수하면서 2년 만에 파리와 영국 런던, 이탈리아 밀라노, 미국 뉴욕 등에 플래그십 매장을 오픈했다. 그는 가방 위주의 보테가 베네타를 탈바꿈시켰다. 2005년 2월 최초의 여성 기성복 패션쇼를 개최했고 2006년 6월 최초의 남성 기성복 패션쇼를 열었다.

보테가 베네타가 토털 남녀 기성복 컬렉션뿐만 아니라 액세서리, 파인 주얼리, 가구, 의자·소파, 향수 등의 브랜드로 거듭나는 데는 마이어의 역할이 컸다. 또한 그는 브랜드의 근간인 전통을 계승하는 데도 중점을 뒀다. 가죽 장인을 양성하기 위해 2006년 이탈리아 비첸차에 ‘라 스쿠올라 델라 펠레테리아(La Scuola della Pelleteria)’라는 독특한 가죽 제품 장인 양성 전문학교를 설립했다. 마이어는 바느질 없이 가죽 줄을 꼬아 가방을 만드는 것은 숙련된 장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전문 장인을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인 학교를 만든 것이다.

‘라 스쿠올라 델라 펠레테리아’의 교육은 기초·전문화·고급 등 세 과정이 있다. 기초 과정은 가죽 제품 가공을 위한 재료·도구 및 기계의 사용과 프로토타입의 완전한 구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공 단계의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이다. 전문화 과정은 프로토타입 코스, 가방 모델링(가방의 기본 모델 패턴), CAD 오퍼레이트 코스로 나눠진다.

고급 과정은 패턴에서 기초 모델 제작까지의 과정과 경영 관리 기술자 코스가 있다. 패턴에서 기초 모델 제작 과정은 가방의 조립, 스티칭 가공 단계에 대한 설명과 실습 등 가방의 기본 모델 패턴을 수동으로 제작하는 것이다. 보테가 베네타는 이런 기술과 가방 제작에 대한 전반적인 교육을 이수한 사람의 80% 이상을 고용했다.

매장, 17개에서 5년 만에 140개로 늘어

가죽제품 장인 양성을 위한 전문학교 '라 스쿠올라 델라 펠레테리아' 모습 사진 출처 : la scuola della pelleteria 홈페이지

토마스 마이어가 디자인한 2015 봄여름 콜렉션 사진 출처 : instagram harpersbazaarmy

구찌그룹이 보테가 베네타를 인수할 당시 전 세계에 17개였던 매장은 마이어의 토털 브랜드화의 전략으로 2006 140개로 늘어났다. 또한 보테가 베네타의 스타일을 마음껏 즐기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 이탈리아 로마, 피렌체의 세인트 레지스호텔과 미국 시카고 파크 하얏트호텔에 매우 독특한 보테가 베네타의 가죽 제품으로 만든 소파와 가죽 소품으로 장식한 스위트 룸을 오픈했다.

마이어가 디자인한 ‘더 놋(The Knot)’은 브랜드의 아카이브(Archive : 브랜드가 보유하고 있는 옛 제품, 디자인 스케치 등의 유산들)에서 발견해 제작한 작고 둥근 박스 형태의 클러치 백(어깨끈이나 손잡이가 없는 여자들이 손에 드는 작은 가방)이다. 이 백은 매듭 모양(Knot)의 잠금 장치가 특징이다. 가죽에 주름을 잡은 ‘오리가미 놋(Origami Knot)’, 가죽 꽃으로 장식된 ‘자뎅 놋(Jardin Knot)’, 앤티크(Antique) 크리스털(Crystal)로 장식한 ‘빈티지 주얼 놋(Vintage Jewel Knot)’ 등 다양한 기법과 소재로 매 시즌 한정판을 선보이고 있다. 더 놋과 까바백은 보테가 베네타 브랜드 고유의 상징적인 아이템이다.

마이어는 “2001년 6월 12일 첫 근무를 시작한 후 9·11 사태와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사태를 겪었고 로고 없는 상품을 디자인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보테가 베네타는 2012 10억 달러의 매출을 달성했다. 하지만 이후 몇 년간 매출이 저조해 마이어는 2018년 5월 17년간 근무했던 보테가 베네타를 떠났다.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학과 교수

 

https://n.news.naver.com/article/050/0000062677?cds=news_media_pc 

 

위기의 보테가 베네타 부활시킨 토마스 마이어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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